-가톨릭, 아르테미스 대신 성모 마리아를 받들었다
-안병무, 민중사건을 예수 사건으로.. 참 하느님 참 사람 양성교리 거부

▲ 사진/한상봉 기자

민중신학자 심원 안병무 선생의 14주기 추모예배가 10월 17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심원 안병무 선생기념사업회(회장 황성규)가 주최한 이날 예배에는 강원돈, 김진호 등 민중신학자들과 문대골 목사(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와 한국디아코니다자매회 이영숙 원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추모예배 후 전철 박사가 <민중신학과 현대사상의 모험>이라는 주제로 심원기념저술지원을 받게 되어 약정서 전달이 있었다. 예배 뒤에는 정양모 신부의 추모강연이 있었다. 여기에 이날 강연 내용을 모두 싣는다. -편집자

1. 신앙의 성찰은 절실하다

메마르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중동에서 인류 문화사에 기여한 바를 든다면 무엇보다 알파벳 문자와 유일신 계시종교들을 꼽겠다. 서기전 15세기 시리아 해안의 우가리트, 일명 라스샴라에서 이름 모를 어느 서생이 창안한 30개 문자로 된 우가리트 알파벳은 소리글자로서, 당시 중동지역에 유행하던 설형문자․상형문자와는 달리 배우기 쉽고 간편해서 인도 서부 모든 문자의 모체가 되었다. 우가리트 문자 다음으로 특기할 소리글자는 한글이다. 1443년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창제한 28개 문자로 된 훈민정음은 세계 문자 역사상 가장 간편하고 합리적인 소리글자이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다.

▲ 정양모 신부
또한 중동에서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이 창교 되어 인류 문화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올리브와 대추야자 말고는 생산품이라곤 거의 없는 삭막한 중동사막에서 태어난 유일신 계시종교들을 일명 아브라함 종교들이라고도 한다. 하나같이 아브라함을 신앙인들의 귀감으로 삼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아브라함 종교들은 모두 독선과 배타에 젖어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 종교 세 가지가 대립하는 이스라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대립하는 레바논,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가 대립하는 이라크 등에선 정치․사회적 알력이 끊이질 않는다.

아브라함 종교들이 독선과 배타에 젖은 까닭은 무엇일까?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여러 차례 여행을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왔는데 저 지독한 독선과 배타는 삭막한 사막이라는 풍토에서 비롯된 것 같다. 사막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오아시스뿐이다. 오직 오아시스만이 생명의 장소다. 그래서 오아시스를 서로 차지하려고 무자비하게 싸운다(여호 6장 참조). 그리고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대상로만이 사람이 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다. 이런 사막 풍토에선 생명의 종교는 하나뿐이다. 영생의 길은 하나뿐이라는 신념이 자연스레 싹틀 수 있겠다. 또한 작열하는 사막을 거닐다보면 절로 인간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그러니 자연스레 자신을 구원해 줄 초월자를 찾게 마련이다.

아브라함 종교들과는 달리 불가․도가․유가는 아시아 푸른 초원에서 생겨난 까닭에 각기 자신의 신념에 대한 자부심이야 있겠지만 독선과 배타심은 훨씬 덜한 편이다. 오곡백과가 풍성한 평원에선 사람들의 생활이 비교적 순조롭고 따라서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남과 함께 살아도 되는 환경에선 독선과 배타보다는 관용과 공존의 미덕이 싹트기 쉬운 법이다. 그리고 절대자의 계시를 바라기보다는 마음공부를 해서 스스로 인생의 이치와 도리를 깨닫고자 할 법하다. 그래서 아시아 평원에서 생긴 종교 이념들은 하나같이 관용 공존 자각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 역시 동방의 생태학 환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다.

한겨레가 사는 금수강산은 생명력이 넘치는 땅이다. 어디를 가나 초목이 무성하다. 이 땅에 아브라함 종교 셋 중 그리스도교만 들어온 까닭에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렇지만 수에즈 운하 동쪽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필리핀을 제외하면 오직 한겨레만이 그리스도교를 대폭 수용한 것은 세계 종교사상 큰 수수께끼다. 불교는 쇠퇴하고 유교는 종교기능을 하지 못하던 종교공백기에 그리스도교가 한반도에 전파된 까닭에 급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일 것이다. 어쨌거나 푸른 초원에 사는 우리 겨레가 중동 메마른 사막에서 생겨나서 유럽에서 자라난 그리스도교를 쉽게 받아들인 것 까지는 그렇다 치고, 그리스도교의 사막 태생과 한겨레의 초원 생태 사이에 큰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겠다. 신학자들은 사나운 눈썰미로 이 간극을 알아차리고 메우는 일을 해야겠는데, 누구보다도 심원 안병무 선생이 이 일에 헌신했다.

2. 신앙 성찰의 달인 심원 선생

내가 이승의 삶을 타고나서 민중 신학자 심원 안병무(1922. 6. 23- 1996. 10. 19)를 알게 된 것은 여간 은혜로운 인연이 아니다. 나는 1971년 5월 광주 가톨릭대학에서 열린 성서 심포지엄에서 안병무 선생을 처음으로 만났다. 선생은 김정준․김용옥 교수님과 함께 심포지엄에 오셔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날 선생의 강연내용보다도 역사비평과 해석학적 성찰로 성서를 연구하는 진지한 자세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 만남의 인연으로 나는 선생이 1973년에 창간한 《신학사상》편집기획위원으로 1998년까지 동참하면서 선생의 내면을 얼핏 엿보는 복락을 누렸다. 이에 관해선 이 글 끝부분에서 상론할 것이다.

▲ 안병무 선생
1979년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와 한국 신학연구소는 공동명의로 <하나인 믿음․새로운 공동신앙 고백서>를 분도출판사에서 펴냈다. 이 번역서의 원본 Neues Glaubensbuch는 독어계 가톨릭․개신교 신학자 36명이 종교개혁이 일어 난지 450여년만인 1973년 함께 펴낸 합동교리서이다. 그 짜임새를 보면 앞부분에선 양교파의 공통교리들을 소개하고, 뒷부분에선 상이한 교리들을 다루었다. 1978년 늦가을 장익 신부와 내가 심원 선생을 명동 주교관에 모시고 이 교리서를 함께 펴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쾌히 승낙하셨다. 가톨릭 용어가 나오면 괄호 속에 개신교용어를 집어넣고, 개신교 용어가 나오면 역시 괄호 속에 가톨릭 용어를 병기하는 식으로 편집했다. 이 책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좋은 길잡이다.

<신학사상>편집 기획위원으로 선생을 25년 동안 섬기면서 겪은 일화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심원 선생은 정교회와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부언하셨다. 세계 종교사를 보면 거의 모든 종교에 남신이 있으면 여신도 있다. 여신에 대한 향수가 성모 마리아 공경으로 나타났다는 말씀이셨다. 나는 에페소를 여러 차례 답사하면서 이 말씀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에페소 원주민들은 본디 토속여신 키벨레를 섬기다가, 서기전 7세기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면서부터 그리스의 풍산여신 아르테미스를 섬기고, 그리스도교가 전해지면서 아르테미스 대신 성모 마리아를 받들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로 추대한 것은 바로 저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에페소에서 심원 선생의 탁견을 확인하고 마음속으로 매우 놀랐다.

선생은 예수 이야기는 즐기면서 교회이야기는 좀체로 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그 까닭을 여쭈었더니 대답이 단호하셨다. “저는 교회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했습니다. 교회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지 오래입니다.” 어느 날 편집회의 때 서양의 새로운 신학사조를 듣다말고 무시해 버리기에, 그 까닭을 여쭈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서양신학의 물결이 얼마나 도도한지 몰라요. 이런 식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백인 신학자들의 물결에 빠져죽어요.” 언젠가 심장병으로 몹시 수척하시기에 두렵지 않으시냐고 여쭈었더니, 당신은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다고 하셨다. 나는 내심 전율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변사했다. 같은 해 5월 18일 고 김승훈 신부가 명동 대성당 강론에서 이 변사사건 내막을 폭로함으로써 호헌철폐 운동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당시 한국신학연구소는 안암동 로터리에 있었는데, 안 박사가 창가에 서서 고려대생들의 엄청난 데모를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정신부님, 박종철 부활보세요, 예수 부활 보세요.”하는 것이었다. 안 박사는 예수와 박종철, 예수와 민중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보셨던 것이다. 예수 부활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민중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영속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연세대생 이한열이 비명횡사해서 데모가 일어났을 때도 안 박사는 같은 말을 했다. 그의 말기 역작(<갈릴래아의 예수-예수의 민중운동>, 한국 신학연구소, 1990)에 예수와 민중 등식 시각이 썩 잘 드러난다.

선생의 많은 논문 가운데서 가장 독창적인 논문은 “예수 사건의 전승모체”(『신학사상』47호 1984년 겨울)일 것이다. 그 논지는 이렇다. 예수 사건을 목격한 민중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중은 유언비어 형태로 예수 사건을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민중이 조심조심 몰래 전한 예수사건 전승을 마르코가 자기 복음서에 채록했다. 그러나 제도 교회는 교권 확립을 위해서 예수 사건 전승을 전하기 보다는 케리그마를 전하는 데 신경을 썼다. 선생의 지론을 압축하면 이런데, 선생은 유신시절의 유비통신에서 이런 발상을 얻은 것 같다. 내 생각으론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집중적으로 전수한 역사적 배경은 아무래도 성만찬이라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들이 토요일 밤마다 모여서 성만찬을 거행할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만 거론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과 행적도 서로 전해주고 전해 받았다고 여겨진다.

▲ 안병무 선생은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가까이 했다.

안 박사는 돌아가시기 삼 년 전인 1993년 5월 30일 강남 향린교회 창립기념 예배 때 한 축사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그리스-로마엔 신인사상이란 게 있어요. 신이며 더불어 사람이란 사상이 있는데, 그걸 예수에게 꽉 맞추었어요. 세상에 해괴한 존재 중의 하나가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란 거예요. 그런 괴물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면 사람이고 신이면 신이지. 신이 완전한 인간이란 것은 그리스 문화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살림>, 1998년 11월 66쪽). 서구의 유명한 신학자들 절대다수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교리․예수 양성교리를 일단 전제하고서 신학 성찰을 전개한다. 저들과 견주어불 때 안 박사의 예수 그리스도관은 기절초풍할 만큼 혁신적이다. 그런데도 안 박사가 이단으로 단죄 받지 않고 기독교인으로 선종한 게 뜻밖이다. 1997년 1월 20일 《신학사상》1977년 봄호 편집기획 모임 때 유동식 박사께 그 까닭을 여쭈었더니 대답이 기이했다. “유신이 안 박사를 보호한 거지요. 유신철폐에 앞장선 안 박사를 보수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몰아붙일 엄두를 못낸 겁니다.”

요즘<다석일지>를 통독하다가 1956년 12월 17일 일지에, 심원이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유학 가서 보낸 편지를 받고 다석이 화답한 답신이 적혀 있다. 답신 가운데서 칠언절구만 우리말로 옮겨 소개하는데 그 내용이 비범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은 나아갈 길을 얻었다.
한국에선 효 신학(孝 神學)을 내세우고 매일 실행한다.
옛적부터 독일은 영웅을 쫒고
한겨레는 고려 이후 하느님 명령에 순응하여 똑바로 선다.”

심원선생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되돌아보니 요즘 우리 신학계는 몹시 초라하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 신학계 우리 신학계 가릴 것 없이 지금의 신학자들은 지능도 용기도 부족한 것 같다. 어쨌거나 우리는 심원의 발자취를 따라 나름대로 믿음의 이치를 밝히려고 노력해야겠다.

정양모 /신부, 프랑스 리용가톨릭대학 졸업,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취득, 1963년 사제서품, 서강대학교 신약학 교수 역임, 성공회대학교 교수, 다석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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