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의 <예수전>을 읽고

예수전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교인은 무슨 소리냐 싶은 물음이겠다. ‘복음서’라고 부르는 신약성서의 맨 앞 네 권(마태오ㆍ마르코ㆍ루가ㆍ요한)이 각각 그 나름의 독특한 예수전이거나, 그 안의 정보들을 종합하면 그것도 예수전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현대의 불신앙자가 도대체 숫처녀가 임신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불치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걷는 등의 얘기가 나오는 문서를 어떻게 믿느냐는 물음을 던지면 대뜸 그리스도교인은 크게 둘로 나뉠 것이다. 복음서를 거의 다 믿을 수 있다고 보는 보수파와 초자연적 기적 얘기를 제외한 나머지를 믿을 수 있다는 자유주의자로 말이다.

물론 보수파도 예수의 처녀 탄생과 부활과 재림까지 사실로 믿는 근본주의자와 그 정도까지는 아닌 온건 보수주의자로 나뉜다. 한편, 매우 자유주의적인 그리스도교인은 예수가 윤리적 행동의 본보기였다는 점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 김규항, <예수전> 돌베개, 2009년

요컨대 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을 얼마나 믿느냐가 핵심 쟁점이다. 거의 1백 퍼센트 믿는 근본주의자부터 이들이 증오하는 유명한 미국 신약성서학 학술단체인 '예수세미나'처럼 예수가 한 것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언행 가운데 겨우 18~20퍼센트만을 믿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들까지 실로 그리스도교인의 분포는 다양하다.

사실, 죽은 사람의 부활까지 믿는다면 그밖에 못 믿을 게 없다. 그러므로 초자연적 기적 얘기는 별문제로 하고 나머지 얘기들만이라도 역사상의 사실인지를 토론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리라. 문제는 네 복음서의 이 부분조차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신심과 영성을 고무하는 경건 문학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말이다.

복음서의 진술은 모순투성이

무엇보다 복음서의 진술이 모순투성이라는 점이다. 가령 마태오의 얘기(2,14~23)로는 아기 예수가 이집트로 간 데 반해, 루가의 얘기(2,22.39)로는 이집트로 가지 않았다. 마르코의 얘기(1,12~13)로는 청년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으로 돼 있지만, 요한의 얘기(2,1~2)에는 그런 언급이 없다. 예수의 사형이 유대교 율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요한 19,7) 그런 근거가 없다고도 한다(요한 18,31). 부활한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래아로 가야 한다고도 하고(마태 28,10),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도 한다(루가 24,49).

예수는 비폭력 무저항을 가르치는가 하면(마태 5,39; 26,52), 폭력적 저항을 준비하라고 가르치고 심지어 실천하기도 한다(루가 22,36; 요한 2,15). 예수의 사명은 평화라고도 하고(루가 2,13~14),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도 한다(마태 10,34~35). 재산은 찬양받는가 하면(마르 10,29~30), 저주받기도 한다(마태 6,19~21;19,24; 루가 6,20~24;16,22).

선행을 드러내라고 예수가 가르치는가 하면(마태 5,16), 선행을 드러내지 말라고도 가르친다(마태 6,1). 신에게 기도로 끈덕지게 간청하라고 가르치는가 하면(루가 18,5.7), 그러지 말라고도 한다(마태 6,7.8). 예수를 믿는 데에 별로 부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면(마태 11,28~30),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고도 한다(요한 16,33).

역사상 많은 이단 시비와 때로 학살마저 일으킨 삼위일체 논쟁과 관계 있는 것으로, 예수는 자신이 신과 같다고 하는가 하면(요한 10,30) 신과 같지 않다고도 한다(요한 14,28; 마태 24,36). 또, 자신이 전능하다고 하는가 하면(마태 28,18; 요한 3,35),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마르 6,5).

예수는 유대교 율법이 자신의 가르침으로 대체됐다고 하는가 하면(루가 16,16), 유대교 율법을 엄수해야 한다고도 한다(마태 5,17~19). 초자연적 기적이 신으로부터 사명을 위임받았다는 증거라고 하는가 하면(마태 11,2~5; 요한 3,2), 그런 증거가 못 된다고도 한다(루가 11,19).

복음서(그리고 성서 자체)의 이런 불일치와 모순 때문에 엥겔스도 이렇게 지적했다. “이 학파[튀빙언 학파 ― 인용자]에 속한 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기적 얘기나 비현실적 얘기는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해서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그 밖의 것들 가운데 ‘건질 수 있는 것들은 건져 내려’ 애쓴다. 여기서 이 신학 학파의 한계가 드러난다.”(F. 엥겔스,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 1894~95.)

혁명 전야, 성서에 의심을 품다

▲ 예수의 초상을 그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을 그림의 대상에 반영시킨다.

근대에 들어와 복음서 기록에 대한 이러한 의구심이 자라나, 실제의 예수(‘역사적 예수’)는 복음서에 묘사된 바대로의 예수, 신앙의 대상인 예수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더했다. 그런 가설을 최초로 체계화한 인물은 18세기 말의 계몽철학자 라이마루스였다. 그는 예수가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유대인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를 자처했지만 로마 당국에 처형당해 참담하게 실패했고, 이를 은폐하려고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빼돌려 감추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린 게 그리스도교의 기원이었다고 주장했다.

라이마루스가 이런 급진적인 가설을 세운 때는 프랑스 대혁명 전야이자 계몽주의의 절정기였다. 이후로도 혁명을 앞두고 ‘불온한’ 기운이 서구 사회 전반을 감돌 때마다 성서에 대한 의심이 퍼져갔다.

1848~49년 유럽 혁명 전야인 1840년대 초에 당시 마르크스와 청년 헤겔파(‘헤겔 좌파’) 동료 사이인 브루노 바우어는 성서의 예수 얘기가 신화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당연시했던 듯하다. 엥겔스도 40년 뒤 브루노 바우어 사망 소식을 듣고 시초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대한 바우어의 공헌을 높이 사는 논설을 독일어 사회주의 정기간행물 <사회민주주의자>(1882년 5월 4~11일치)에 기고했다.

복음서 등 신약성서 문헌의 신뢰성에 대한 회의론은 20세기 초반에 또다시 정점에 도달했다. 이 시기는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제1차세계대전,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1918~20년 중ㆍ서부 유럽 혁명, 1930년대 대불황과 스페인 혁명, 프랑스 공장 점거 운동 등의 격변으로 점철된 질풍노도의 시기다.

1906년,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든 <예수의 생애 연구사>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9세기의 수많은 예수전이 어째서 실패작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낱낱이 들춰내면서, 복음서가 전기나 전기적 자료가 될 수 없음을 입증했다. 그는 아프리카 정글에서 의술 활동을 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밀림의 성자’로 우리에게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라이마루스와 브루노 바우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위대한 신약성서 학자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이자 탁월한 신학자인 알프레드 루아지는 역사의 예수가 신앙의 대상 예수와 어렴풋하게 연관돼 있기는 하지만, 복음서의 희뿌연 연기를 뚫고 실제 예수의 광휘를 분명하게 볼 수 없다고 주장해 1908년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독일 혁명의 여파 속에서 출판된 <예수>(1926)에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약성서 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이렇게 썼다. “예수의 삶과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자료들이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데다 단편적이고, 흔히 전설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다른 [역사적]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보수주의자들이 예수에 대한 “독자적 확증”이라며 제시하는 로마측 자료는 모두 중세의 필사본일 뿐이다. 따라서 그 사이에 덧붙여진 게 뭔지 알 수 없다. 가령 타키투스 <연대기>의 가장 오랜 필사본은 11세기 것이다.

슈바이처와 불트만보다 더 나아간 철저한 회의론자들도 있었다. 역사적 예수 탐구가 불가능하다면서도 슈바이처는 예수가 유대교 묵시록의 전통에 따라 세말을 예언했다고 상술했고, 불트만도 예수에 대한 책을 썼던 것이다. 철저 회의론자들인 독일의 알베르트 칼토프와 아르투어 드레프스(Arthur Drews), 영국의 존 M 로버트슨과 가톨릭 사제 출신자 조셉 맥케이브, 미국의 존 렘스버그 등은 예수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신화상의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을 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이런 주장에 동의했다. 칼 카우츠키는 <그리스도교의 기원>(1908)에서 예수 신화론을 개진했고, 레닌도 1922년에 쓴 한 논설(“투쟁적 유물론의 중요성에 대해”)에서 드레프스의 저작 <그리스도 신화>가 러시아어로 번역되는 것을 지지했다.

반자본주의 정서와 예수 상(像)

불트만 이후 1990년대까지 그보다 더 회의적인 신약성서 문헌 분석가는 주류 신약성서 학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68년 운동의 시대에 등장한 각종 해방신학(라틴아메리카 민중 해방, 여성 해방, 흑인 해방, 성소수자 해방 등)은 정치적으로는 불트만보다 진보적이었지만, 복음서 등 신약성서 문헌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 면에서는 전혀 불트만보다 진보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과 급진적 비판이 확산되면서 복음서와 나머지 신약성서 문서에 대한 회의론도 다시 고개를 들어, 역사적 예수 탐구와 예수전 집필 시도는 다시 의구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날 가장 자유주의적인 경향의 역사적 예수 탐구자들은 '예수세미나' 회원들이다.(한국에도 알려진 대표 인물로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존 쉘비 스퐁, 월터 윙크 등이 있다.) 이들의 관점은 (1) 사회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2) 예수를 유대교 안에 자리 매김하고, (3) 예수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 공식 경전(‘정경’이라고 함)에 포함되지 못한 고대 그리스도교 문서들인 이른바 외경을 사용한다는 세 가지 점에서 이전의 역사적 예수 탐구와 구별된다.

그러나 급진적인 철저 회의론자들(가령 예수 신화론자들인 로버트 M 프라이스, 조지 알버트 웰스, 얼 도허티 등)은 예수세미나 회원들도 지난 2백여 년 동안의 예수전 집필자들이나 역사적 예수 탐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나 시초 교회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미리 결정하고는, 그 다음에, 예수의 생각이었다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에 부합하는 구절들을 골랐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예수 당시로부터 유래하는 예수 얘기나 목격자 증언이 하나도 없는 한은 예수 상(像)의 재구성은 불가능하다.

결국 오늘날에도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해 예수전을 써 보려는 사람들은 슈바이처가 예리하게 지적한 문제점에 직면하고야 만다. 즉, 예수전을 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예수에게 투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초상을 그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그림의 대상에 반영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주의자는 예수를 낭만가로, 비폭력 평화주의자는 예수를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사회 개혁주의자는 예수를 사회 개혁가로, 사회주의자나 혁명가는 예수를 사회주의자나 혁명가로 채색했다. 이렇게 말한 슈바이처 자신은 예수를 묵시록적 유대교 전통에 따라 세말을 경고한 예언자로 보고 아프리카로 의료봉사 활동을 하러 떠났다. 최근 인기를 끄는 일부 ‘예수세미나’ 회원들은 예수를 동시대 견유철학파의 현인으로 본다.

견유철학파는 재산ㆍ권력ㆍ명예ㆍ건강에 대한 욕망을 거부하고 자연과 부합하는 반(反)인습적 삶을 살았다. 그래서 기원전 4세기의 견유철학자 시노페 태생 디오게네스는 아테네 거리의 노숙자로 통 모양의 용기 속에서 살아 그 학파의 전형을 보여 줬다. 크로산과 버튼 맥 등의 주장은 예수가 이와 비슷한 일종의 대항문화를 구현했다는 것이다.

특히, 가톨릭 사제 출신인 크로산은 예수가 국가 권력에는 도전하지 않은 채 사회의 근본적 변혁에 헌신했다는 주장을 해, 2000년대 반자본주의 운동 내 자율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결론을 맺자면, 김규항의 <예수전>은 예수라는 거울에 반사된 좌파 칼럼니스트 김규항의 상(像)이다. 천대받는 사람들과 일체감을 느끼고 자본에 반대하는 사람의 글은 무조건 추천할 만하다. 정말 예수가 역사상 인물이라면, 김규항이 묘사한 것과 흡사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제공/레프트21>

최일붕/ 미국 클레어먼트신학대학원 종교사회학 전공. '다함께'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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