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조국은 아프고 슬펐지만, 자랑스러웠다

조국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리던 시절이 있었다. 태극기를 마음에 그려보면 슬프도록 처연한 산하가 함께 중첩되며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흐르던 시절이 있었다. 동학혁명, 3.1, 4.3, 6.25, 4.19, 5.18 등 근현대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가슴에 스며든 조국은 아프고 슬픈 나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였다. 해월과 전봉준을 읽으며 함석헌과 장준하를 읽으며, 4월과 5월의 시를 읽으며, 신동엽과 전태일과 권정생을 읽으며 이 땅에서 밟히어간 혼들을 떠올리면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했던 바울로의 말이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조국은 아프고 슬펐지만, 조국에 속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숱한 곡절을 거치며 오늘에 이른 조국은 이제 더 이상은 내게 충성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가난과 약함을 깔아뭉개면서 발전하고 성장해온 조국은 이제 자랑이 아니라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군사정권은 그러려니 해도, 소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라는 김대중, 노무현 시대를 체험하면서, 이른바 민주화라는 그들의 집권 시기에 사회의 약자들이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것을 보면서,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파병을 선동하고, 과감하게 파병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경멸하게 되었고 태극기를 수치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에게 민주화라는 말은 자기이익과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렇게 많은 역사적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그토록 많은 피를 쏟았음에도 우리의 정치는 더욱 지저분한 난장판이 되고 말았고, 가난과 약함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은 더욱 무뎌졌으며, 우리의 문화는 더욱 폭력적이고 말초적으로 바뀌고 말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하는 보통 사람들과 기업과 정부와 경찰의 처사를 보면서, 조국은 인종차별과 계급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가 돼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4대강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조국은 이미 무지하고 폭력적인 야만의 나라로 들어서 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단을 넘어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회에 전쟁광 부시 전 대통령을 초청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사진/한상봉 기자)

마음 공부 하기 어려운 나라.. 애국가도 역겨운

마음공부의 요체는 감정이 걸리면 일단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용산, 세종시, 천안함, 4대강, FTA, 삼성 등 여러 가지 화두를 전방위적으로 적나라하게 던지면서 마음공부를 톡톡히 시켜주고 있다. 마음공부가 잘 되었다면 이명박이나 이건희 같은 인간, 또는 조중동을 보면서 화를 내거나 미워할 게 아니라, 측은한 마음이 먼저 일어나야 할 텐데, 그런 마음이 쉬이 일어나지 않으니 도를 닦는 길은 과연 멀고도 험하다.

미숙하고 무지한 중생으로 가엾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런 시각을 도무지 갖기 어려우니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하기는 내가 저들을 그렇게 본다고 해도 저들이 그리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 칼로 찌르면 칼에 묻은 피를 닦아서 찌른 사람에게 곱게 돌려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는 장일순 선생은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내셨을 것인지 궁금하다.

천안함 사태를 보면서 한동안 분노가 들끓어서 어떻게 하지를 못해 하릴없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 분노가 조금 가라앉을 즈음, 방과후 학교에서 바둑을 배우는 둘째가 바둑대회에 참가할 일이 생겼다. 대회가 열리는 체육관으로 들어서니 벌써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있었다. 아이가 바둑을 둘 장소를 찾아주고 관중석으로 와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바둑대회를 시작하겠다며 모두 국기를 향해 일어서 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소위 국민의례였다. 태극기 자체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마는, 순간 기분이 확 잡치면서 겨우 가라앉혔던 분노가 솟구쳤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태우면서 분노를 잠시 달래기는 했지만, 바둑대회와 국민의례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제 더 이상 태극기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애국가는 이제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는 역겨운 가락이 되고 말았다.

이런 나라가 존속할 가치가 있는가?

올곧은 선비와 가난한 시인의 나라는 끝장나 버렸고, 꿈에 그리던 인민의 나라, 민중의 나라는 한바탕 꿈속에서나 존재했던 것이 되고 말았다. 지금 정치인들과 기업가들과 군장성들과 고위 경찰관들에게서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을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볼 수 있는가? 양심적인 학자들을 만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시간강사들은 곁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일신의 안녕을 넘어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대학 교수들을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 돼버렸는가? 법조인들에게서 합법적 판결을 기대할 수 있는가? 경찰과 공무원들에게서 공정함과 희생, 봉사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는가? 은행과 기업가들로부터 ‘이윤’이외의 윤리를 만날 수 있는가? 언론인들에게서 참된 언어를 들을 수 있는가? 그리고, 종교인들에게서 종교성을 기대할 수 있는가?

반민특위를 작살내며 들어선 친일과 친미의 나라 대한민국
농민과 노동자를 압살하며 부를 이룬 나라 대한민국
사람도 모자라 강산까지 파헤치며 경제를 위해 모든 것을 팽개치는 나라 대한민국
어린 자녀들과 초등학생들을 학원에 위임하는 나라 대한민국
중고생들이 자살하는 나라 대한민국
대학들이 장사판으로 변해버린 나라 대한민국
시간강사들이 자살하는 나라 대한민국
4-50대 가장들이 자살하고 급살을 많이 맞는 나라 대한민국
노인 자살률이 높은 나라 대한민국
교통사고가 가장 빈번한 나라 대한민국
성추행과 성폭행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 대한민국

세계 10위 경제대국 대한민국
이런 나라가 더 힘이 세지고, 더 부자나라가 된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더 잡아먹고,
자연에는 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게 될 것인가.
이런 나라가 존속할 가치가 있는가?
존속해야 한다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존속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생물이어서 자라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하루 아침에 죽어버리기도 하고..(사진/한상봉 기자)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경멸한다

이제 나는 조국이라는 단어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경멸한다. 이제 태극기는 걸레로도 쓰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역겹다. 이제 나는 어떤 상황이 오건 조국의 안위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야 한다. 강토가 파헤쳐지는 것에 마음이 아프겠지만 언제 마음이 안 아팠던 역사가 있었던가? 조금만 더 아프면 된다. 4대강 사업을 섣불리 반대해서는 안 된다. 섣불리 조국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이 모진 대한민국의 목숨만 더 길어진다. 시간문제이고 어차피 망하는 수순이라면, 한 쪽이라도 피곤하지 않게 더 빨리 망하도록 도와주는 게 좋다.

4대강 사업 현장에 가서 목숨 걸고 반대할 게 아니라, 마음대로 삽질하고 파헤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대학생들도 여름방학 때 농활을 갈 것이 아니라, 4대강으로 모여서 동반 삽질을 해주어야 한다. 산을 더 많이 깎아서 골프장을 짓게 하고, 웬만하면 다 때려 부숴서 재개발하게 하고, 성당이나 교회건물이나 절간도 크고 폼나게 짓고, 여차하면 모든 것을 저들의 친환경으로 재정립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동차도 더 많이 생산하게 하고, 도로도 더 많이 짓게 하며, 원자력 발전소도 방방곡곡에 지어서 저 잘난 녹색혁명, 녹색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어야 한다. 녹색성장 정도가 아니라, 진녹색, 진초록성장을 할 수 있도록 친환경 초록색페인트를 구입해서 모든 건물과 도로에 초록색으로 처발라 주어야 한다. 우주선도 성공할 때까지 마구 쏘아 올릴 수 있도록 독려하고, 가능하다면 우주에 위대한 대한민국의 식민지를 번듯하게 건설하도록 추궁해야 한다.

황우석같은 희대의 사기꾼도 발전을 위해서 빨리 복권시켜 주어야 한다. 혹시 잘만 되면 대한민국이 아니라 전체 지구를 먹여 살릴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승만을 국부로 세우고, 박정희는 경제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대통령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위대한 영도자로 칭송하고, 김대중, 노무현을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숭앙해야 한다.

이명박은 4대강을 살리고 있는 위대한 살림 선구자로 더욱 찬양해주어야 한다. 살아있는 민족의 영도자로 받들어주어야 한다. 모든 인간 말자들과 저 모든 파렴치한 정치인들과 기업인들과 종교인들을 받들고 숭상해서 진정한 21세기형 휴머니즘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진정한 자연주의가 어떤 것인지, 진정한 녹색 발전이 어떤 것인지 만방에 떨쳐 보여주어야 한다.

조선이 내부에서 썩고 외부의 충격으로 스러져갔듯이, 우리의 대한민국도 그렇게 사라져갈 것이다. 무능하고 폭력적이었던 가부장의 나라 조선은 일제가 아니더라도 망해야 마땅했던 나라였다. 폭력과 야만의 나라, 자본과 권력과 온갖 힘이 활개치는 나라 대한민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망해야 한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 살아난다면 ‘대’와 ‘한’을 없애고, 군바리들과 정치꾼들과 재벌들이 설치지 않는 ‘민국’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대한민국, 나는 너를 저주한다. 오늘 나는 조국 대한민국의 파멸을 기원한다.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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